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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사항
벚꽃축제 졸업생 초대글
- 관리자
- 조회 : 19845
- 등록일 : 2014-04-06
졸업생 여러분에게
그간 어떻게 지냈나요? 책상 유리판 밑 학생명단을 보니 하나같이 보고 싶은 얼굴들이네요. 매체들을 열심히 모니터링 하고 가끔 연락을 주고받기도 해 동정을 아는 졸업생도 많지만 소식 두절된 이도 꽤 있네요. 결혼식 같은 데서 못 보던 졸업생들을 보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학교 행사 등과 겹치는 날을 빼고는 만사 제치고 졸업생 결혼식에 참석해온 것도 당신들을 만나는 여분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학교로 올라오다 보니 진입로 양쪽에 도열한 벚나무들이 한껏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더군요. 실은 서울에 벚꽃이 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요 며칠 조마조마했습니다. 오는 12일 ‘세저리 벚꽃축제’라는 이름으로 홈커밍데이 행사를 여는데 벚꽃이 다 지면 어쩌지? 지구 온난화를 다시 한번 원망할 뻔 했습니다. 다행히 제천의 서늘한 기후 덕분에 이번 주말에는 만개한 벚꽃이 여러분을 반겨줄 것 같습니다. 아래는 벚꽃축제 초대장인데 졸업생들은 대부분 보지 못한 것 같아 여기에 옮겨봅니다.
덧없음!
벚꽃을 보면 떠오르는 생각입니다.
피어있는 기간이 짧기도 하지만,
떨어지는 모습이 더 아름답기 때문일까요?
일제히 피었다가 집단자살 하듯 한 순간 지고 마는 벚꽃은
공동체의식이 강한 족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국의 벚꽃축제가 유난히 기간이 짧은 것도 그 때문인 듯합니다.
청풍벚꽃축제는 11일부터 단 사흘 열립니다.
우리 세저리도 이 찬란한 봄을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
벚꽃이 만개하는 4월12일(토) 오후 재학생과 졸업생, 그리고 교수진이
우의를 다지는 홈커밍데이 겸 체육대회를 열까 합니다.
선생님들도 다 좋다고 하네요.
바베큐를 비롯한 음식은 충분히 준비해놓을 테니
졸업생들은 아무런 부담없이 모교를 방문하고
재학생들은 재미있게 놀 프로그램만 짜두면 되겠습니다.
단순한 체육대회가 아니라 축제처럼 준비해서 초보 직장인과 예비언론인이 봄날 하루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문화관 뒤쪽에 초등학교 운동회처럼 천막도 치고 ‘목로주점’도 낼 작정입니다. 대강막걸리에, 파전이나 떡볶이 같은 것도 지지고 볶고 한답니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옛 애인이 돌아오듯 여러분도 그렇게 오시기 바랍니다. 이연실의 <목로주점> 노랫말도 참 멋지죠.
이왕이면 더 큰 잔에 술을 따르고
이왕이면 마주 앉아 마시자 그랬지
그래 그렇게 마주 앉아서
그래 그렇게 부딪쳐 보자
이왕이면 마주 앉아 마시자 그랬지
그래 그렇게 마주 앉아서
그래 그렇게 부딪쳐 보자
모든 준비는 학교에서 할 테니 졸업생들은 오후 1시까지 운동화 신고 몸만 오면 되겠습니다. 조교가 카톡 등으로 알렸지만 초대장은 좀 늦었는데 약속이 있는 사람은 늦게라도 오면 좋겠습니다. 특히 자퇴를 하거나 진로를 바꾼 사람들도 이번 기회에 모교를 방문하면 더욱 반가울 것 같습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지만, 한번 몸 담은 세저리도 마찬가집니다.
벚꽃 얘기를 좀 더 하면 실은 진입로 벚나무들은 나와 꽤 인연이 있습니다. 아는 이는 알겠지만, 저널리즘스쿨 생기기 전 석좌교수 때 삭막한 캠퍼스가 안타까워 학교 간부들 모셔놓고 ‘Toward Natural Campus’라는 주제로 프리젠테이션을 했지요. 그때 제안한 게 자살하기 딱 좋은 물웅덩이를 접근하기 쉽게 5m쯤 끌어올려 연못으로 만들고, 모든 잔디밭에 학생 못 들어가게 둘러친 회양목을 뽑아내 곳곳에 밀식하고, 잔디밭 말고도 억새밭 메밀밭 보리밭을 만들고, 진입로변 소나무 사이에 심어진 벚나무를 인도로 전진배치하자는 거였습니다. 가로수는 단일수종이라야 장쾌한 맛이 있거든요. 로마에서도 유적보다는 지중해 소나무 가로수에 반해, 저녁 노을을 배경으로 높이 늘어선 소나무 실루엣을 쳐다보며 마냥 걸었던 적이 있습니다.
캠퍼스가 걷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바뀐 것보다 더 기뻤던 것은 나 같은 신참자의 말도 귀담아 듣는 이 대학 풍토였습니다. 애초 ‘이 시골 구석에 세명대 간판으로 저널리즘스쿨이 될까’ 하는 의구심 속에서도 결국 시작하고 만 것은 남의 말을 수용하고 전폭 지원하겠다는 자세에 끌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얼마 안 가 많은 벽을 느끼고 개인적으로 발목이 잡혔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나를 괴롭히는(책 읽고 글 쓰는 데는 도움되지만) 빌어먹을 조울증도 내가 치른 기회비용의 허망함과 당신들이 좋은 직장에 진출할 때마다 선사하는 희열이 교차하면서 발생한 거 같습니다. 때로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열정, 때로는 바닥 모르는 침잠이 조울증의 시작인 줄 몰랐습니다.
나 때문에 인도로 나앉은 벚나무들도 당신들과 함께 성장해 여러분이 중견 언론인이 되어 모교를 찾을 때는 진해의 벚꽃터널 같은 풍경을 연출할 겁니다. 벚꽃은 봄마다 나를 아련한 회한 속으로 데려가는 꽃이기도 합니다. 해군 사관후보생 시절 갖 사귀기 시작한 여자는 "먼저 선본 남자와 약혼 날짜를 잡자"는 아버지 독촉에 시달렸고, 내 뜻을 확인하러 벚나무 가로수가 아름답기 그지 없는 군항도시 진해로 왔습니다.
함상훈련중인 장교후보생은 면회가 안 된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녀는 함대사령부 정문 헌병대에 면회신청을 해놓고 흑백다방에서 온종일 기다렸지요. 간신히 외출을 나가 막차 시간에 쫓기며 마산까지 잡아 탄 택시에서 그녀가 말했습니다. 내가 먼저 결심을 해야 한다고......
가슴 아린 추억, 더는 들추지 않겠습니다. 결과는......
영화 같은 해피엔딩이 현실에도 많다면 영화가 재미없겠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벚꽃은 해마다 피겠거니 했는데, 이제 내 나이도 60갑자가 돌아오니 달리 보이더군요. 문득 하이쿠 같은 한 구절이 떠오르네요.
사람들은 벚꽃을 좋아라 하네
저 꽃을 몇 번 더 보면
하직할 이승인데……
여러분도 가는 봄을 놓치지 마세요.
2014년 4월 6일, 이봉수